받아들여야 하는 것 - 1 :: 행동버섯 (원산지: 자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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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정버섯 (도,度)의 농장/짧은 생각 2022. 7. 29. 16:12

    고등학생일 때 사설 인터넷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쯤 물리를 좋아했고 좋아하는 과목을 더 잘하고 싶어 생전 처음으로 돈을 내고 강의를 들었었다. 선생님의 이름, 얼굴, 목소리, 강의 내용 무엇 하나 기억나는 것이 없는데 딱 하나 여전히 기억나는 잡담이 있다. 노력의 시간과 성과의 상관관계의 관련된 내용이다. 수업하시던 도중에 대뜸 칠판에 있는 것을 막 지우시더니 x축과 y축을 쭉쭉 그으셨다. 그리고 기울기가 1쯤 되어 보이는 직선 하나를 쭉 그으셨다. 다음 수업을 준비하시나 보다 했다. 물리 수업에 일부라 생각하고 나 역시 공책에 x축과 y축을 쭉쭉 긋고 직선을 하나 그었다. 자를 대지 않았는데 선이 이쁘게 그어져서 기분이 좋았다.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을 때 x축에는 노력이 적혀 있었고 y축에는 결과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가셨다.


    " 이것이 여러분들이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틀린 그래프예요"

     

    무슨 말일까? 저게 맞다고 생각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오는 건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기울기가 2쯤 되게 그렸어야 했나? 기울기가 0.2쯤 되게 그렸어야 했던 걸까?' 조금 혼란스러웠던 와중에 그래프를 쓱쓱 지우시고 새로운 그래프를 그리셨다. 계단 같은 모양이었다. 어느 구간에서는 정체기가 길고 올라가는 높이가 짧고 또 어떤 구간에선 정체기가 매우 짧고 계단의 높이가 높았다. 제멋대로 개성 넘치는 그래프였다.

     

    "내가 공부한 시간과 결과는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내가 들이부은 시간에 비해 결과가 빈약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언젠가 성과가 크게 나타나는 순간이 올겁니다. 마치 이 높은 계단 구간 처럼요.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마세요. 나는 여러분들이 이 높은 계단을 두 개 정도만 올라가 봤으면 좋겠어요. 과정이 참 힘들 수도 있고 처음 계단을 오를 땐 긴가민가할 수 있지만 두 번째 계단을 오를 땐 확신할 수 있을 겁니다. 나도 할 수 있다는걸. 그리고 두 번째 계단을 오른 성취감이 여러분을 더 열심히 할 수 있게 만들 겁니다. 힘내세요 수험생 여러분"

     

    당시 저 말에서 큰 울림을 받았다. 수험생 시절에 저 말을 많이 곱씹었다. 정체기를 견디며 몇 번의 시험에서 성적이 오르는 걸 경험하며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더욱 열심히 했다. 아침 8시에 등교하여 수업을 듣고 점심 저녁 시간에 빈 시간이 있으면 틈틈이 공부했다. 11시에 야자가 끝나면 근처에 독서실로 가서 3시까지 문제집을 풀었다. 

     

    나는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몇 번의 모의고사에선 합격선의 성적이었지만 정작 수능에선 결과가 안 좋았다.

     

    나는 왜 그때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을까. 왜 수능에 실패했을까. 마지막 화학 시험을 밀려 썼다. 화학 시험을 밀려 쓴 것은 나의 실력일까? 내가 아는 문제로 가득 채워졌다면 시간이 부족해서 답안지를 급하게 쓰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내가 좀 더 노력했다면 모르는 문제는 없지 않았을까? 운이 나빴다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매사 운을 탓하며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인간이 될 것 같았다.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생각은 날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지 못했다. 한동안 자기연민과 패배감에 빠져 살았다. 


    얼마 전에 일을 시작했다. 채용에 합격하고 지인들에게 알렸다. 고생했다고 말해주었고 축하해주었다. 축하와 격려가 감사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작은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사실 이 채용에 합격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합격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력서를 적당히 잘 채우고 자기소개서를 잘 썼다. 면접을 잘 봤다. 하지만 같이 쓴 다른 친구는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다. 나보다 이력서 내용이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았을 거다. 나는 운이 좋았다. 이전 학부 시절 때 국가 근로 알바로 1년 정도 과사무실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그 덕에 조교 선생님이 날 아시고 채용 공고를 보내주셔서 이런 일자리가 있는 지 알게 되었다. 또 잠깐 대학원에 진학해서 석사 과정을 했던 적이 있다. 잠깐 대학원을 다녔기에 교수님을 알게 되었고 대학원에서 자퇴했지만 감사하게도 서류 면접 당시 교수 추천서를 작성해주셨다. 내 인복에 감사하며 크게 느낀 바가 있다.

     

    운칠기삼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운칠기삼이란 말은 고2 때 처음 들었다. 우리 반에 들어 오시는 수학 선생님께선 수업 중간중간에 사자성어를 읊는 것을 좋아하셨다. 앞에 썼던 장황한 수식을 팔을 크게 내지르며 쓱쓱 지우시고 칠판에 크게 運七技三이라는 한자를 턱턱 적으셨다. 그러고 나를 콕 찍어 읽어 보라고 하셨다. 나는 칠과 삼 밖에 읽지 못했다.  운칠기삼은 인생의 어떤 일에 있어 운이 7할이고 재주(노력)이 3할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잘되거나 못 됐을 때 이 말을 함으로써 운이 중요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포송령(蒲松齡)의 '요재지이'(聊齋志異)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선비가 자신보다 변변치 못한 자들은 버젓이 과거에 급제하는데, 자신은 늙도록 급제하지 못하고 패가망신하였다. 죽을 작정을 하고 대들보에 동아줄을 매어놓고 생각하니 자기보다 못한 자들이 번번이 급제한 것이 억울하여 죽을 수가 없었다. 이에 옥황상제에게 가서 따져보기로 했다.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에게 술 내기를 시키고, 만약 정의의 신이 술을 많이 마시면 선비가 옳은 것이고, 운명의 신이 많이 마시면 세상사가 그런 것이니 선비가 체념해야 한다고 일렀다.

     

    내기 결과 정의의 신은 석 잔밖에 마시지 못하고, 운명의 신은 일곱 잔이나 마셨다. 이에 옥황상제는 "세상사는 정의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장난에 따라 행해지되, 3푼의 이치도 행해지는 법이니 운수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선비를 꾸짖고 돌려보냈다.

     

    선생님은 내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크게 부르시곤 운칠기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물어보셨다.

    "음.. 노력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당시 나는 그렇게 답했다. 선생님께선 희미하게 웃으시며 수업을 이어 나가셨다. 앞서 말했듯 운이 나빴다 얘기하는 것은 스스로 나태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꼴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칠기삼이란 단어는 사람의 노력을 운이 좋았다며 폄하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점차 흔들린다. 하나의 신념이 나이를 먹어가고 경험이 많아지며 다양한 삶을 들여다보면서 말라서 얄상해지고 있었다. 일에 실패 할 때, 적잖이 노력해도 원하는 능력을 얻지 못했을 때 노력이 부족했다 말해왔건만 그것이 자신을 스스로 굉장히 지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생각은 사람이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들고 일의 효율을 떨어트린다. 그리고 무너지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었다.

     

    많은 부분이 이미 행운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능력주의라는 정치철학이 있다. 능력주의는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만 쌓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우리는 이 원칙에 환호해왔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 부터 능력주의 시대에 살고 있었으며, 사회는 노력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주입했다. 하지만 능력과 노력만을 강조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하여금 불평등을 정당화하게 만들었다. 능력주의 사회는 결국 노력보단 성과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어떤 일에 실패하면 사람들은 아주 쉽게도 노력이 부족했다고 속으로 생각하거나 쉽게 말한다. 회사 면접에서 학점이나 스펙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살아왔는 지 전혀 생각도 안한 채 개인의 인생을 폄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배경이 안되면 더 노력했어야지'라고 말하는 경우도 종종 귀에 들린다. 다수의 경우가 개인의 사상에 근거한 쓸 데 없는 몰아세우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압박 면접이라는 구차한 변명으로 포장한다. 심지어 어떤 면접자는 내가 나약해서 그 말을 견디지 못한 것이라며 자신의 노력을 폄하하고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채찍질한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은 높게 평가하지만 세습이나 유전자, 특혜, 시대상등의 운의 영역은 낮게 평가한다. 대학에선 고등학교 생활을 얼마나 성실히 했는지 수능이라는 수단으로 노력을 평가한다. 회사에선 학점을 보고 학교 생활을 성실히 했는 지 평가한다. 사회는 그것이 꽤 공정하다고 느끼게끔 만들었다. 자격증이나 학벌, 스펙을 보는 것은 노력을  꽤 정량적으로 평가한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노력은 절대 정량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 책 조차 사기 힘든 환경에서 생계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학생과 아낌없는 지원 속에서 쾌적하게 공부할 수 있는 학생처럼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을 같은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능력주의의 함정이다. 우리는 능력을 쉽게 평가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노력은 한 발 한 발 계층 사다리를 올라가 계층 이동을 하는 행위가 아니다. 노력은 잠자리채다. 성공은 잠자리고 노력은 잠자리채를 휘두르는 것이다. 잠자리를 채집하기 위해선 잠자리채를 휘둘러야 한다. 휘두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잠자리를 채집할 확률은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잠자리채가 다르다. 누구는 집채만한 채를 붕붕 내지를 때 누군가는 숟가락만한 잠자리채를 휘적휘적거려야 할 수도 있다. 잠 자리가 많은 터전에 자리 잡았을수도 있다. 잠자리 수와 상관없이 몇번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채집할수도 있는가 하면 수년을 휘둘러도 잡히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모두 내가 정하지 못하는 운의 영역이다. 지금 사회는 내가 잠자리를 얼마나 잡았는지만 관심이 있다. 

     

    행운이 생각보다 성취, 성과, 성공 심지어 내 노력까지 많은 요소에 깃들어 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사회에서 잔소리 하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압박 아래 현재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에너지를 과하게 쓰게 만들어 무너지게 만든다. 내가 여기서 잠자리채를 더 휘두르면 본인한테 무리가 가는 지 판단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자리를 옮길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다.  

     

    행운의 영역을 자각해야 어떤 일에 성공 했을 때 내 성공이 오직 스스로의 행동에 의한 결과로 믿게 만들어 스스로 대단하다는 오만한 착각에 빠지지 않게 한다.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 능력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노력을 폄하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게 한다. 물론 운이 좋았다고 나의 노력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 꼭 겸손의 화법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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