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닭까지는 키워봐야 하지 않겠나. :: 행동버섯 (원산지: 자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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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닭까지는 키워봐야 하지 않겠나.
    감성버섯 (호, 昊) 의 농장/에세이 2020. 9. 13. 00:42

     

     

      글이 쓰고 싶었다.

     

      제작년에도, 작년에도 가끔가다 꼭 글을 쓰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 순간들은 컴퓨터게임 속 영웅의 칼질 한번에, 임박한 시험기간의 압박에, 친구들과의 소주 한잔에 잊혀졌다. 우연히 혼자 남은 밤, 시간적 여유까지 따라준다면 그제서야 조금 끄적이곤 했는데, 아주 운좋게 살아남은 그 녀석들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정말 이상하게도 자의적으로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의무적인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꾸준함을 유지하기엔 재미가 없었다.

     

      50여개의 배설물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어느새 행동버섯의 내 카테고리인 '감성버섯 농장'에는 50여개의 글들이 쌓였다. 지금 돌아보면 부끄러운 글들이 더 많다. 계획뿐인 글들도 많고, 쓰다가 졸았나 싶을 정도로 내가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글들도 있다. 글의 내용을 떠나서 글에 대한 태도가 부끄러웠다. 글을 쓰고 싶었던 나의 욕심만을 배설한 그 배설물들을 공공장소에 전시해놓은 것 같았다. 창피함에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별로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고, 항상 글감은 부족했다. 그나마 쓰고 싶은 것이 명확할 때는 술술 써지는 재미가 있었지만 쓸 게 없어서 짜내서 쓸 때는 정말 고통이었다. 쓰는 시간은 두세배로 드는데 결과물을 보면 모순된 말 투성이었다.

      

      배설물, 거름이 되다.

     

      짜내서 쓴 글은 배설물처럼 부끄럽다. 하지만 배설물은 사용하기에 따라 거름이 되기도 한다. 시멘트 바닥에 놓으면 똥이고, 텃밭에 놓으면 거름이다. 억지로 쥐어짜낸 글들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멋진 글들을 멋지게 피워낼 거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재미는 없을지라도 뿌듯할 것 같긴 하다.

     

      잘 안나오면 짜내보자.

     

      케첩이 좀 안나온다고 바로 버리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적어도 한번이라도 쥐어 짜지 않는가. 이왕이면 글이 좀 안나오고 귀찮아도 구석구석 짜내보자. 혹시 메마른 핫도그에 단비같은 한 뭉텅이 케찹이 뿌려질지 모른다.

     

     

      병아리를 죽게 하는 것

     

      어릴 적 두어번 문방구에서 뽑기로 병아리를 데려온 기억이 있다. 찰나의 호기심으로 데려온 그 삐약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3일을 넘기지 못했다. ''문방구 병아리는 원래 3일 밖에 못 살아''라는 위로의 말에 미안함과 죄책감을 닦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에 반박하듯 보란듯이 닭으로 키워낸 사람들이 가끔 TV에 나온다.

      문방구 병아리는 원래 3일 밖에 못 사는 것이 아니라 키워내기 까다로운 것이다. 너무 관심을 쏟느라 큰 스트레스를 줘도 안되고, 관심을 너무 안 줘도 죽기 십상이다. 결국 사느냐 죽느냐는 주인의 능력이다. 나의 글을 죽인 것도 결국 나라는 주인이었다. 글 쓰는 것 뿐만 아니라 무엇을 하든 원래 잘 키워내기는 까다롭다.

     

      이번 병아리는...

     

      9일부터 오랜만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병아리는 지나친 관심과 기대를 갖지도, 무관심으로 대하지도 않고 잘 키워서 삐약거리는 그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도록 잘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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