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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과일 1감성버섯 (호, 昊) 의 농장/에세이 2020. 9. 10. 23:39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과일은 가장 맛있을 시기에 사람들이 따간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그렇다면 미처 선택받지 못한 과일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있는 힘껏 열매들에게 양분을 공급해주던 나무도 겨울이 오고, 제철이 지나면 마음과 다르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결국엔 열매가 떨어지거나 썩는다.
'나의 제철은 현재라는 생각'
이 들어서 조금 부담스럽고 슬퍼졌다.
예전에는 '졸업하고 나면 어디선가 나를 데려가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혼자만의 막연한 그 '생각'은 자신감의 형태로 둔갑하고 있었지만 대학교 정규 과정을 수료한 그 날 저녁, 몰래 짐을 챙겨 달아났다. 그리고 그 자리엔 조바심과 부담감이 새로 들어왔다.
한국에서 흔히 졸업 후 6개월 내에는 취직을 해야한다는 통념이 있고, 나는 그 통념에 꽤 동의한다. 따라서 나는 현재 졸업한지 6개월이 되지 않은 '제철과일'이다. 하지만 솔직히 6개월 내로 누가 나를 채집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에 막막하고 불안하다.
본 집은 강원도에 있고, 대학은 서울에서 다니며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다. 수료 후에 어디서 지낼까 고민하는 시기에 가장 원했던 한가지는 부모님께 더이상 기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의 집에서 같이 지내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 마련을 할까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취준 기간이 너무 길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최종적으로는 고향 집에서 지내며 용돈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부끄럽다.
어디 가서 무슨 과일이냐고 물어보면 봄에는 수박이라고, 여름에는 사과라고, 가을에는 귤이라고, 겨울에는 딸기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 제철 안 지났다고 말하고 싶다. 그 부끄러움의 근원에는 다 익은 열매가 아직 나무의 영양분을 빨아먹고 있다는 미안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땅바닥은 두려워서 사람들의 손에 채집되기를 원하는 욕심이 있다.
글이 길어져서 '철 지난 과일2'에서 마저 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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