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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무감성버섯 (호, 昊) 의 농장/글쓰기 2022. 1. 2. 23:50
아실 지 모르겠다.
'딸랑무'는 '총각무'의 강원도 방언이다. 춘천사람이라서 어릴때부터 듣던 말이기에 '총각무'보다는 이 제목에 더 정이 갔다.
두 달 전쯤 우리 집에는 딸랑무 사태가 났다. 어머니께서 인심좋게 딸랑무김치를 많이 담그셨는데 공교롭게도 작은이모께서 딸랑무김치를 큰 통 가득 주시고, 앞 집 사는 할머니께서도 딸랑무김치를 주셨다. 11월이 제철이긴 한가보다.
나는 덜 익은 배추김치를 좋아한다. 스테이크 6단계 중 생고기나 다를 바 없는 블루레어 단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 풋내 날 정도의 아삭한 김치도 좋다. 그런 것은 칼국수 먹을 때 곁들이면 기가 막힌다. 딸랑무김치도 배추김치와 같을 줄 알았다. 어머니께서
"이건 좀 익어야 해"
라고 하셨지만 얼른 먹어보자고 보챘고, 마지못해 한접시 내어주셨다.
"아작"
소리는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아린맛이 강하고 쓴맛도 나는 것이 영 별로였다. 어머니 말씀이 맞았다. 그 뒤로 한동안 식탁 위에는 딸랑무가 올라오지 않았다.
어제 저녁, 오랜만에 식탁 위에 녀석이 다시 올라왔다. 별로 좋지 않은 맛으로 기억되던 녀석에게 나는 눈길한번, 젓가락질 한번 주지 않았다. 하지만 곧 아버지의 감탄사.
"이거 하나만 있으면 식사 끝이다."
반신반의하며 한 입 베어물었다.
"아작"
지난번과 소리는 같았다. 하지만 그 식사에서 나는 밥을 한공기 더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저녁에 오랜만에 사회복무요원 후임들을 만났다. 고백하건대 그들을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복무시절에 일적으로 마찰을 빚은 적도, 감정이 상한 적도 없다. 다만 공적인 자리 이외에 사적인 시간을 들여서 그들과 노는 것이 내겐 꽤 소모적으로 다가왔었다. 그래서 얼굴 한 번 보자는 말에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반복되다보니 그들도 나를 거의 찾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달, 오랜만에 후임이 한번 보자고 제안했고, 이번엔 왠지 거절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같이 커피를 마시며 꽤 많은 대화를 나눴다. 못 본 사이에 다들 다양한 삶을 살고 있었고, 서로의 삶에 대해서 여러가지 시각으로 조언을 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핑계 대지 않고 그들과 만났고, 역시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익어야 맛있는 게 딸랑무뿐만은 아닌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별로 맛 없다고 생각했던 인간관계도 어느새 서로에게 큰 힘이 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연락이 뜸하다고 해서
'아 이 친구와는 점점 멀어지는 건가'
하며 아쉬워하기보다 더욱 더 감칠맛을 내뿜을 서로에게 기대감을 품어보자.
당장 맛 없다고 버리지는 말자. 어떻게 잘 숙성시킬지를 고민해보자. 어느날 갑자기 식탁 위에 올라와 당신의 밥 두공기를 비워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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