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뻑살의 묘미(feat. 닭가슴살)감성버섯 (호, 昊) 의 농장/에세이 2020. 9. 9. 00:17
두자리수는 지겨웠나보다.
나의 체중은 어느새 세자리수를 향해 달아나려고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챈, 어쩌면 알고도 눈 감아주던 나는 얼마전 인바디검사를 통해 99kg의 수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나의 몸무게는 꽤 오랬동안 90kg였는데 순식간에 9kg가 늘어나버린 것이 믿기지 않았다. 100에서 1 모자란 99라는 숫자는 스스로에게 꽤나 충격이었나보다. 한창 운동할 때도 하지 않던 식단관리를 시작하기로 했다.
가장 만만해 보이는 닭가슴살.
단백질 함량은 100g 당 31g정도 되고, 가격도 1kg에 5,000원이면 구매할 수 있다. 무엇보다 몸 좀 만든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의 도시락통에 가져다니면서 먹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기에 으레 '닭가슴살을 먹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물론 매 끼니를 닭가슴살만 먹지는 않는다. 나의 기초대사량인 1750과 운동량을 고려하여 하루에 2200kcal정도를 먹는다. 또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을 4 : 4 : 2 로 먹으려고 노력한다. 이 비율을 맞추려다 보니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만큼은 일반적인 식사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몸무게가 드라마틱하게 변했다거나 몰라보게 잘생겨진 것은 아니다. 까비.
그것은 바로 저녁식사가 굉장히 맛있어졌다는 것이다. 너무 뻑뻑해서 뻑살이라고도 부르는 닭가슴살을 먹다보니 입맛 자체가 매우 겸손해지고, 순해졌다. 적어도 빨갛게 양념된 매콤한 제육볶음, 아니면 기름이 속속들이 배어있는 돈까스 정도는 있어야 훌륭한 저녁식사라고 여겼던 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쌈채소의 수분이 감사하고, 작곡밥의 구수함에 미소짓는다. 잘 씹히지도 않는 닭가슴살 요놈이 단백질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나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재미와 묘미의 미묘한 차이.
묘미 [ : 미묘한 재미나 흥취, 묘취] 라는 말이 떠올랐다. 묘미는 재미와는 미묘하게 다르다. 그동안 정말 많은 재미를 추구해오며 살았다. 하지만 재미라는 것이 참 쉽게 익숙해지고,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뻑살은 크게 자극적이거나 중독적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내가 좋아하는 '고기'이며, 운동 후의 헛헛함을 채워주고, 요리하기에 따라 끝맛이 고소하기도 하다. 뻑살의 묘미를 알게 된 것이다.
뻑살같은 하루.
어쩌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취준생이라는 학년이 되었다. 나는 다를 줄 알았지만 중간고사는 불안감으로 대체하고, 기말고사는 자격지심으로 제출한다. 이 두가지 대체시험 때문에 노는 것도 크게 재미는 없다. 어서 이 기약 없는 학년을 졸업하고자 몇가지 일정과 계획들을 세우고 실행할 뿐이다. 참 뻑뻑하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새벽까지 술마시고 게임하던 흥겨움들이 종종 그립다.
하지만 나는 이제 뻑살의 묘미를 알지 않는가. 모든 삶에는 제각각의 영양소가 있지만 지금 이 시기에는 뻑살들의 단백질을 잘 음미해보려고 한다. 직접 만나서 손 잡던 애인과의 애틋함이 영상통화 속의 그리움으로 대체되었지만 이 또한 감사한 저녁식사와 같으며, 코로나로 인해 헬스장은 못 가지만 밖에서 친구와 조깅하며 하늘을 한번 더 쳐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귀찮은 것으로 치부했던 글쓰기도 이렇게 다시 원하게 되었다.
뻑살의 묘미. 고놈 참 매력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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